경산 자인 / 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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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 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지의 별밤


성주사지 3층석탑(보물 20호)



무량사는 신라시대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다가 죽은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초기에 개창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병화에 의해 사찰 전체가 불타버린 뒤 조선 인조 때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보물 제356호)·5층석탑(보물 제185호)·석등(보물 제233호) 등이 있으며 이밖에도 당간지주와 김시습의 부도가 남아 있다.



정산리9층석탑(보물 제18호)



마곡사는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율사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에 의해 중건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대광보전(보물 제802호)·5층석탑(보물 제799호)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특이한 형식이며 그 주변으로 영산전(보물 제800호)을 비롯하여 응진전·명부전·국사당·대향각·흥성루·해탈문·천왕문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이밖에 중요문화재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보물 제269호),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보물 제270호), 석가모니불괘불탱(보물 제1260호), 동제은입사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 동종(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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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는 논산시 연산면 위치한 사찰로, 고려 태조 19년에 왕건후백제를 평정하고 이곳에 국찰로 창건토록 한 개국사찰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이 명하여 개태사를 창건토록 하였는데, 이는 태조가 전쟁을 하면서도 백성이 생업을 유지하게 하며 나라를 세웠음은 부처님과 산신령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개태사라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아들 신검에게 나라를 빼앗긴 견훤이 개태사에서 쓸쓸하게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일대는 백제계백 장군신라김유신 장군이 전투를 벌였던 곳에 가깝고 고금을 통해서도 군사, 교통상의 요지로서,  철확(가마솥,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과 삼존석불상(보물 제219호)이 봉안되어 있다.


돈암서원
김장생의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 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고, 또한 1659년(효종 10)에 이어 1660년 (현종 1), 두 번 사액을 받은 특이한 사례이다. 돈암서원은 영향력의 범위가 넓어서 호서 지역 전체 뿐만 아니라 호남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에도 보존된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968년(광종19) 혜명(慧明)에 의해 창건될 때 조성된 석조미륵상이 발산하는 빛을 좇아 중국에서 명승(名僧) 지안(智眼)이 와 예배했다고 하여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경내에는 관음전·삼성각·사명각·해탈문·현충각 등의 당우가 남아 있으며, 석조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석등(보물 제232호)을 비롯해 사리탑·연화배례석·사적비 등이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사적 제14호로 부여읍에서 동쪽으로 약 3㎞ 가량 떨어져 있으며  야산의 남사면에 줄을 지어서 배치되어 있는데 동서 양쪽으로 나지막한 구릉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현재 모두 8기가 알려졌다.
능산리 고분들은 사비시대(538~660)의 백제 왕족묘로 추정된다. 

 


정림사지는 사적 제301호로 1942년 발굴조사 때 강당지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중건 당시 절이름이 정림사였고, 절터가 중문·석탑·금당·강당이 남북선상에 일렬로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두른 전형적인 백제식 가람배치인 남북일탑식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과 정림사지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부여군 부여읍에 위치한 부여박물관은, 주로 백제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6,586평의 대지 위에 건물 총면적은 590평, 전시실 면적은 230평 규모이다 .

 

대조사는  마곡사의 말사이며 전설에 따르면 한 스님이 한 아래에서 수도중에
관음조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바위 위에 앉자 놀라 잠을 깨니 바위가 미륵 보살상으로 변해 있어서 절 이름을 대조사라 하였다고 한다. 대조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절의 뒷편 언덕에 있는 보물 제217호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논산 관촉사의 미륵보살입상과 함께 투박하고 개성있는 고려 불상 양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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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경주 안강 / 201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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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택은 이언적(李彦迪)을 봉사(奉祀)하고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안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이언적의 고택 사랑채이다.

 


경주 안강 / 2011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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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건물들의 배치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된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 막아, 집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보통 대문은 행랑채와 연결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대문의 왼쪽에 사랑방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누마루로 ‘관가정(觀稼亭)’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온돌방, 부엌, 작은방들을 두었고 그 앞에 ㄷ자로 꺾이는 안채가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살림을 하는 공간으로, 부엌, 안방, 큰 대청마루,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이 된다. 네모기둥을 세우고 간소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뒤쪽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기둥을 세워 조금은 웅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사랑방과 누마루 주변으로는 난간을 돌렸고,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으로 이어져 있다. 
관가정은 조선 중기의 남부지방 주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양동마을 / 201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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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551)이 토속신앙을 제천행사로 통합시키고 불교의례를 결합하여 처음 개설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팔관회를 계승해 국민통합의 수단으로 불교의례에, 건국 공신들을 추모하는 위령제 기능을 추가해 고려 최고의 문화축제로 거듭나게 했다한다. 고려 팔관회는 민족 전체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비는 범국가적 행사이자, 단순 종교행사를 뛰어 넘어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의례가 결합된 국가축제였으며, 외국의 사신들과 상인들이 모여드는 국제적인 문화교류의 장이기도 하였다. 이번 2011 대구 밀레니엄 팔관회’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도경 등의 문헌자료와 의례도감 자료, 악지 자료 등 충실한 역사고증에 의해 복원, 재연되어 그 의미가 특별하다고 할수있다.  팔관회는 궁궐에서 팔관회장으로 나서는 임금의 출궁행렬을 시작으로 팔관회의 핵심의례이자, 가장 화려한 볼거리인, 백희가무에 이어 세계 각국의 음악이 연주되는 만방정주9성, 외국인 조하, 팔관경설, 연회, 입궁행차까지, 천년 전 우리 선조들이 만방에 자랑하며 펼쳤던 국제문화축제의 현장이 그대로 옮겨진다.


행사내용은

제1장 - 난가출궁 (임금출궁 행차의 도착과 단상좌정)

제2장 - 좌전조하 (임금이 태자와 신하들의 축하의 예를 받는 조하의례

제3장 - 백희구진 (임금에게 진상되는 다양한 백희공연 궁중정재)

제4장 - 외국인 조하 (외국사절단의 축하를 받는 외국인 조하)

제5장 - 만방정 주구성 (각국 가무악의 진상)

제6장 - 연회, 팔관치어, 임금 입궁 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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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마을 내에는 보물 3점, 중요민속자료 12점, 도지정유형문화재 4점, 도지정민속자료 1점, 도지정기념물 1점과 문화재자료 1점이 있고,  주요 문화재로는 무첨당(보물 제411호)·관가정(보물 제442호)·향단(보물 제412호)·양동강학당(중요민속자료 제83호)·양동낙선당(중요민속자료 제73호)·양동수운정(중요민속자료 제80호)·양동수졸당(중요민속자료 제78호)·양동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양동안락정(중요민속자료 제82호)·양동이동기가옥(중요민속자료 제76호)·양동이원봉가옥(중요민속자료 제74호)·양동이원용가옥(중요민속자료 제75호)·양동이향정(중요민속자료 제79호)·양동이희태가옥(중요민속자료 제77호)·경주손동만씨가옥(중요민속자료 제23호) 등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 / 201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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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흥덕왕릉 / 201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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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흥덕왕릉 / 201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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