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는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 시대부터 외세와 격렬하게 충돌해 온 역사의 현장이다. 이런 강화지역이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이에 이은 병인박해 때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 정부가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바로 이곳 갑곶 돈대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 군은 후퇴했으나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는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극심했던 박해의 하나로 기억되는 병인박해가 시작되게 된다. 갑곶 돈대에서 보이는 바다 건너편의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이 박해로 성연순과 원윤철이 통진에서, 1868년 박상손, 우윤집 등이 강화에서 순교했고, 1879년에는 통진에서 권 바오로가 순교했다. 성지에는 순교자 3위비가 세워져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평생 동안 아버지 박 바오로(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를 서울 왜고개 성지에서 삼성산으로 옮긴 이)처럼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순교자들의 삶을 정리하며 사셨던 증거이자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모신 묘가 있다.
(출처 -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반주골(이승훈 묘)
이승훈은 1756년 태어나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마재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당대의 석학 이벽과도 교분을 갖게 된 그는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된다.
영세 후 이벽, 정약전 형제,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갖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되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을 지어 첫 번째 배교를 한다.
1786년 다시 교회로 돌아왔으나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배교를 했고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로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후 4월 8일 참수되었다.
1981년에 반주골에 안장되었던 이승훈의 유해가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 권철신 · 일신 형제,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다.
(출처 -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요당리 성지는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교우촌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교우촌은 양간공소라 불리며 갓등이(현재의 왕림)와 은이 공소(현재의 양지)와 깊이 연계되어 활발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또한 바닷물의 유입으로 뱃길이 열렸던 이곳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아니라,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신앙의 요람지였다.
이곳 요당리 성지에서 태어났거나 순교한 부들 가운데에는 장주기 요셉 성인과 ‘하느님의 종’으로 시복시성을 추진 중에 있는 장 토마스 등 여러 명의 순교자가 있다. 또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의 책임하에 이곳에서 운영되었고, 민극가 성인과 함께 신앙 전파에 힘쓰다 순교한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이 활동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순교하신 앵베르 주교와 이분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한 손경서 안드레아의 얼이 서려 있다.
(출처 -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