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 / 201308
전주에 위치한 경기전은 조선 태종 10년(1410)에 완산·계림·평양에 건물을 짓고 태조의 어진(초상화)를 모신 곳으로 세종 24년 부터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불렀다고 한다. 경기전은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광해군 6년에 고쳐 지었다. 건물 구성은 중심 건물과 부속건물, 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제사기능을 가진 건축물의 특성을 잘 따르고 있다. 지금 이곳에 모신 태조의 영정(초상화)은 세종 24년(1442)에 그린 것을 고종 9년(1872)에 고쳐 그린 것이다.
경기전 정전 (보물 제317호)
태조어진(초상화) 국보 제317호
전주사고 -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가 주요문서를 보관하였다.
예종대왕 태실 및 비 (민속자료 제25호)
하마비 - 경기전의 하마비는 암수 두마리의 동물이 비를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이곳은 문익점의 18세손인 문경호(1812∼1874) 때 이곳에 터를 잡았다. 원래 절이 있었던 명당터인 이곳에서 최초로 건립한 건물은 용호재(1834년)로서 현재의 광거당이 있는 곳이었다. 마을의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인 수봉정사(壽峰精舍)는 수봉선생이 돌아가신 후 그의 뜻을 기리기위해 지은 건물이며 광거당(廣居堂)은 1910년 용호재터에 접객과 자제들의 학덕 증진을 목적으로 건립한 건물이다. 서고(書庫)인 인수문고는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1만여 권의 책을 수집하여 보관하던 건물이다. 이곳은 건축연대가 200년 미만이나 전통적인 영남지방의 양반가옥의 틀을 지키고 있으며, 대구 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있다.
육신사는 조선 세조때 사육신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 등 六臣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처음에는 충정공 박팽년 선생만이 후손에 의해 배향되어 오다가 현손인 계창공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어 놀라 다섯분을 함께 향사를 지냈으며 그로 말미암아 낙빈사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였다. 그후 고종 3년(1866)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서원과 함께 훼철되었으나 1924년에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다시 사육신을 이곳에 봉안하였으며 1974년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에 따라 육신사를 건립하게 되었으며, 1981년에 외삼문, 숭절당, 관리사, 담장등을 갖추었다. 사당 주위에는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와 태고정(보물 제554호)이 있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입향하여 거주한때로부터 560여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가 집성하여 살고있는 전통깊은 마을이다. 경북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동에 이르고 있으며, 건축물의 대부분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되었으나, 전체적인 마을구성이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 및 평면도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하겠다.
채미정은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 길재(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년 (1768년)에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금오산과 채미정 전면의 맑은 계류와 수목들이 채미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경관미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참조 : 문화재청
-회고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데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예천 개심사지 5층석탑 (보물 제53호)
예천 동본리3층석탑
예천 동본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427호)
예천 초간정 (명승 제51호)
구미 독동리 반송 (천연기념물 제357호)
구미 낙산리 가야시대 고분군